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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과 한국

by human1026y 2025. 1. 27.

 음악을 듣다보면 참 많은 생각이 든다. 넘치는 에너지, 자유와 음악성의 꽃 피움, 그와 함께 연상되는 수많은 기행들, 명과 암이 이렇게 뚜렷했던 음악 장르가 과연 이 시대 전후로 존재할까. 필자는 락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단순히 음악 내적뿐 아닌 외적인 이유에서도 닿는 부분이 있다. 자유의 상징으로써 락을 바라보고 또 좋아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포스트모던의 사고를 어느정도 체감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지금은 그 역할을 힙합 등의 장르가 어느정도 대체하는 것 같다만 락만큼의 쾌감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물론 이건 필자가 힙합을 거의 모르기 때문인것도 같다만...) 어찌되었든 락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적격인 장르기 때문에, 또 그 표현방식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한 음악적 양식으로 이어지기에 포스트모던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허나 자유에는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첫째로, 자유란 이름으로 모든 것이 용납된다는 것은 아닌 바, 두 번째로 한 개인의 자유를 위해 타인 혹은 다수의 자유가 침해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이 두 번째 주의사항은 모던(근대)와 포스트모던에서 주요하게 해석된다. 한편 70년대 한국은 흔히 암울한 억압의 시대로 표현된다. 특히 문화적 측면에서는 군사문화와 새마을 노래, 노래의 메아리로 대표되는 음악 정화 운동 등이 존재했던, 말 그대로 음악의 탄압, 정치화가 이루어진 시기로 많이 묘사된다. 필자는 이 시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락 음악과 그 운명, 그리고 이에 담긴 사연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와 모던, 포스트모던이라는 소재로 전개할 것이다. 근대란 어떤 것일까. 현대사상 입문이라는 책에서는 근대를 민주화와 산업화의 진행으로 보다 자유롭게 살게 된 이들이 공통적인 인간의 진보를 향해가는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담 그 전은 어떠할까. 전근대의 목표는 오직 근대이다. 이는 발전해가는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할 숙명이자 운명인 것이다. 70년대로 돌아가 보자. 민주화에 대해 (상당히 정치적인 이야기지만) 나는 빛 좋은 개살구라고 생각한다. 그건 4.19 혁명이라는 역사가 증명해주니 말이다. 한편 남한 땅의 산업화는 이제 막 발을 뗀 상태였다. 심지어 60년대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빈민국 중 빈민국이었다. 즉 대한민국의 70년대는 근대를 향하는 시기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민주화와 산업화 중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에 대해 논해도 무방하지만 그것은 정치의 영역이니 넘어가고 우리는 70년대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국가 전체와 국민의 자유가 먼저 이루어지고 국민 개별의 자유가 차례대로 돌아가는 것이 온당함은 프랑스 혁명 등 세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근대로의 입구에서 겔너 등의 학자들은 충분한 경제를 그 받침으로 꼽은 바 있다. 즉, 국가 경제가 살아남으로써 경제적 자유를 기반으로 한 국민들의 생활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닌가. 허나 경제적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단결이다. 초기 산업화에서는 기업, 이학박사들, 그리고 많은 인력이 필수인데 이들이 움직이는 가장 효율적이고 이상적인 방식이 바로 다 같이 단결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이지만 고리타분한 군사문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단결하는 데 있어서는 가장 적합한 사회 풍토가 아닐까 싶다.

 

 허나 이 시기 락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마치 신의 장난처럼. 락의 태동은 거의 대부분의 그 당시 음악이 그렇듯 미군기지에서 시작되었다. 미군 사단에서 음악성을 인정받은 이들이 사회로 나와 유행시킨 장르 중에 하나가 락 음악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소회지만 초기 한국 락의 대표주자인 신중현의 음악은 지금 들어도 전혀 밀림이나 부족함이 없다. 그의 사이키델릭 사운드는 여전히 일품이다.) 락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정확히는 포크와 같이 겪었지만 말이다)은 바로 당시 정부가 시행하고 있던 국민개창운동이었다. 그 당시 락은 자유, 해방이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르였다. 비틀즈로부터 급속도로 번진 히피문화가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러나 국민개창운동은 정부의 총화 계획, 순수음악가들의 순수음악에 대한 강력한 의지, 국민들의 왜색 추방 운동이 결합된 범국가적 음악 운동이었다. 이 상황에서 락 음악과 음악가들의 태도는 국민개창운동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특히 나운영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마치 이어령 작가의 ‘흙 속의 저 바람 속에’와 같이 한민족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순수음악을 만들고 싶어했다. 특히 이들은 대중음악의 소위 ‘질 낮음’을 비판하고 나섰고 이들이 음악계의 주요 요직을 차지한 상황에서 락 음악의 시련은 불 보듯 뻔한 것이다.(당시 한국이 지금과 같이 각 장르가 장르별로 평가받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히 하고 가야한다. 당시 풍토상 락은 청년들의 일탈수단 정도로 생각되었다.) 즉, 근대로써의 일도 도약에 락은 전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정부, 순수음악계, 사회상의 모두가 락에게 긍정적인 목소리를 보내지는 않았던 것이다. 락이 추구하는 자유는 아직 이른 단계였다고 할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다행이도 이 첫 번째 시련 속에서도 락은 유지되었다. 청년들 사이에는 락의 열풍이 잔존했던 셈이다. 그러나 1975년, 락에게 더 큰 시련이 다쳤다. 대마초 파동, 1975년부터 가수들이 대마초 흡연 혐의로 줄줄이 잡혀갔던 사건이다, 대마는 특히 히피 문화에서 많이 퍼졌는데 한국도 이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아 락 뮤지션들이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마의 문제가 커지자 당시 정부는 대마 근절을 강하게 명령했고 그에 따라 대부분의 락 음악가들(신중현, 이장희, 조용필 등)이 활동금지 처분을 받았다. 락 음악의 침체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 시련을 불행히도 락은 잘 견뎌내지 못했다. 80년대 즈음에 락은 면죄부를 받았으나 그 때는 이미 시대가 지난 후였다. 댄스트로트 등의 댄스 음악과 발라드 등의 낭만과 사랑의 노래가 강세였던 그 시대에 락은 설 자리를 잃었다. 조용필 또한 락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상은 성인가요를 했고 그것이 그를 지금의 가왕으로 만들었다. 물론 그 음반들은 한국 음악사상 최고의 음반들이며 필자는 조용필을 한국 최고의 음악가로 꼽는다. 그렇다 해도 조용필이 락을 전면에 두지 못한 것은 사실이기에 이가 참 안타까울 따름이다. 모던의 입구가 되어야 했던 락은 결국 모던 이후의 음악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이는 한국 급성장의 이면이다. 순수음악이 민족성을 토대로 그 저력을 여실히 보여준 탓에 우리는 근대의 산물인 락을 온전히 즐기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나 상당히 안타깝지만 이는 민족 발전에 있어서 불가피한 시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80년대 그룹사운드, 락 밴드를 거치며 90년대부터 인디 밴드란 이름으로 존속하던 한국 락은 2024년 밴드음악이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부활하고 있다. 락이 대한민국의 포스트모던을 밝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