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문화와 건전가요
건전가요, 이름만 들어보았을, 너무나 생소한 개념이다. 미스, 미스터트롯의 유행이나 옛 음악의 좋은 음악성으로 인해 젊은 층에게도 나름 인기있는 트로트나 2024년 현재 밴드 음악이란 이름으로 다시 동력을 얻고 있는 락과는 달리 인기도 없고 정치적 이유로 기피되기 때문에 건전가요는 언급조차 되지도 않는다. 그나마 역사에 관심 있는 몇몇이 새마을 노래 등을 역사서에서 보았을 뿐일 것이다. 그러나 건전가요는 우리의 생각과는 당시 음악가들의 의지를 통한 높은 음악성과 근대화라는 당시 이념에 따른 국민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범국가적인 음악이었다. 또한 이 중심에 군사문화의 역동성, 단결성 또한 간과해서 안 될 부분이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부터 내려오는 건전가요의 역사 중 60-70년대의 건전가요를 눈여겨보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실 건전가요는 일제 때부터 존재하는 개념이었다. 가요정화운동과 국민개창운동으로 대표되는 일제의 건전가요는 크게 가정가요운동으로 대표되는 가정건전가요(필자가 붙인 이름이다. 이 글에서 군가적 성격을 띄지 않는 건전가요를 부르는 이름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와 군국가요로 나뉜다. 군국가요의 목적은 오직 강제징용을 역사적 도리라고 말하는 내용이 오직이다.(추후 필자는 이를 애국가요와 비교하는 데 다시 한번 상기시킬 것이다.) 가정건전가요는 국민을 문화로 통제하겠다는 일제의 수단이었다. 미리 말하겠지만 건전가요는 당연히 통제와 질서 확립을 목적으로 한다. 필자는 이를 부정할 생각이 전혀 없음도 밝힌다. 어쨌든 건전가요는 일제에서 그치지 않고 1950년대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건전가요는 가요에 대한 규율 자체가 마련되어있지 않거나 미비한 상태이기에 건전가요 또한 친정부 성향을 지닌 일종의 가요로 인식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저축을 하세와 같은 생활과 밀접한 음악부터 박시춘 선생의 ‘금수강산에 백화가 만발하였구나’, 손석우 선생의 ‘소녀의 꿈’ 등이 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건전가요는 몇 개의 성향으로 갈라져 체계화되기 시작한다. 기존의 건전가요를 가져온 것도 있었으나 대부분 외국에서 기악, 작곡 등 순수음악의 영역을 공부한 이들을 대거 등용했다. 50년대의 건전가요가 박시춘, 손석우로 대표되는 대중음악 작곡가라는 점과는 반대다. 60-70년대 건전가요의 첫 번째 유형 ‘순수음악가를 위시한 가정건전가요’다. 대표적으로 1962년의 ‘노래의 메아리’ 사업이나 1967년의 ‘다 함께 노래 부르기’ 운동의 작사, 작곡가 명단이 대부분 이들 집단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나중에는 한국방송윤리위원회, 가요심의전문위원회 등에 발탁되어 대중가요 탄압에 앞장서는 데 이는 단순히 그 당시 정부의 탄압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저들 집단 중 행동파로 불린 나운영 선생의 인터뷰에는 박정희 정부를 ‘일본유행가가 보급된 후에야 단속을 시도하는 정권’이라며 비판하는 모습도 담긴다. 즉, 그들의 순수에는 정부의 의도 뒤에 당시 대중음악에 대한 순수음악계의 불만, 분노라고 보는 것이 맞을 수도 있겠다. 특히 그들이 주장하는 순수에는 반공과 반일이 강하게 자리 잡았으니 왜색이라고 평가받았던 트로트는 당연히 기피, 탄압의 대상이 것이 뻔했다. 어쨌든 이들은 단순 건전가요를 넘어서 기악곡, 가곡, 국악 등의 (60-70년대 건전가요의 두 번째 유형인) ‘다양한 형태의 순수음악’들을 배출해낸다. 이때의 정부 또한 클래식 산업을 확장시켰단 평을 받는다. 또한 (특히 70년대에) 애국가요와 진중가요와 같은 건전가요도 유행한다. 이들을 세 번째 유형 ‘군사건전가요’라고 이름을 붙이겠다. 조국찬가는 1955년에 만들어진 곡이지만 제 2의 애국가라 불리며 높은 음악성과 시기적절한 가사로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받았다. 또한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는 맹호들은 간다, 달려라 백마, 돌아온 용사 등의 진중가요가 유행했는데 이들은 모두 군사문화의 색이 짙은 노래이다. 사실 군사문화는 건전가요가 널리 퍼지고 빠른 경제 발전, 국민의 단결을 만들어낸 일등공신이다. 군사문화를 중심으로 한 총화 정신 중 음악을 담당하는 것이 건전가요의 체계적 생성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수도 있겠다. 이런 군사문화를 기반으로 한 건전가요 중 핵심을 이루는 것이 바로 애국가요인데 나의 조국, 새마을노래, 조국찬가, 일하는 대통령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애국가요의 국가주의적인 성향 탓에 일제의 군국가요와 비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목적부터 완전히 다르거니와 국민들의 선호도 또한 군국가요와 애국가요를 같은 선상에 둘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애초에 새마을노래와 같이 사회의 긍정적인 면에 참여하라는 독려의 노래와 전쟁이라는 부정적 행위를 참여하라고 강요하는 군국가요는 그 성향부터가 같을 수 없고 그에 따라 국민들의 선호도 또한 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80년대에도 건전가요는 계속되었다.(정확히는 88년까지) 허나 이 때 건전가요는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과 같이 한결 유해지고 대중화된 건전가요라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 시절은 대중음악의 상당한 개방이 이루어진 시절이다.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난 우리가 근대의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즉, 근대화 이후 건전가요는 점차 의미 없어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건전가요가 근대로의 도약을 위해 국민 통제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이들이 60-70년대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음은 예술의 다양성을 막는 행위로 이어졌다. 그러나 군사문화를 필두로 한 건전가요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사연 또한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를 넘어 현대의 문이 열린 지금, 어쩌면 국가를 위해 사용되다 매정하게 버려진 건전가요의 억울함도 달래주어야 할 시기가 오지 않았을까.